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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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흥조 광리군 (손긍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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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리군 묘소 전경

경남 밀양시 교2동

 

  중시조(中始祖)이신 광리군(廣理君)의 휘()는 긍훈(兢訓)이시다. 긍훈(兢訓) 즉 손대장군(孫大將軍)께서는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훈공(勳功)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에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킨 분이시다. 당시 국운(國運)이 기운 신라말(新羅末)에 후백제 견훤(甄萱)왕이 운문산(雲門山)에 지룡산성(地龍山城)을 쌓고 기습부대를 만들어 신라(新羅)공격을 노리던중 서기 927년에 지룡산성(地龍山城)을 출발하여 간월산성(間月山城)의 신라군(新羅軍)을 무찌르고, 신라군을 포위(包圍)하여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과 왕비(王妃)를 죽이고 국권(國權)을 휘어잡은 후백제 견훤(甄萱)왕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을 허수아비로 왕위(王位)에 올려놓았다. 이에 손대장군은 송도 개성(開城)의 고려왕 왕건(王建)을 찾아가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간청해 왕건(王建)이 손대장군의 지휘하에 15,000명의 기마병(騎馬兵)을 주어 후백제군 토벌(討伐)에 나섰다. 손대장군은 당시 견훤왕을 몰아내고 왕에 올라있던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을 생포하고 후백제군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고려가 마침내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어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정일품(正一品)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니 그 명성이 일세에 떨치게 되었으며, 사후(死後) 밀양부북교동춘복동(密陽府北校洞春福洞)에 장례하고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追贈)하였다. 후세(後世)인이 손대장군의 공훈(功勳)과 명성(名聲)이 당대의 으뜸이었으나, 역사에 그 사적(史蹟)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사당(祠堂)을 세워 관()으로부터 수물(需物)을 갖추어 향사(享祀) 하였다. 특히 광리군께서는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위하여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思想敎育)을 보위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후세인(後世人)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추화산정 사당(推火山頂 祠堂)에 소상(塑像)을 모셔 부내관주(府內官主)로 향사(享祀)를 지내오다 춘복재 현충사(顯忠祠)로 옮겨 봉안(奉安)하여 춘삼(春三) 추구(秋九) 중정일(中丁日)에 향사 하고 현재 추향제(秋享祭)는 墓所에서 행한다.

公은 또 임진왜란 때 밀양에 왜병이 침입함에 손장군과 수천의 신병 환상이 추화산에 나타나 왜병을 쫓았으며 인조조(仁祖朝)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이필달(李必達)이 많은 군사로 쌍령(雙嶺)에서 분전하고 충주 달천(忠州 達川)에서 싸울때 공이 꿈에 나타나 부사 이필달에게 현몽하여 전원 무사히 생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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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화산성(推火山城) 성황사(城隍祠)  

 

  밀양시 교동 모례 마을 서쪽 산정(山頂)에 있으며,신라조 때 괴질(怪疾)을 몰아내어 백성을 편안하게 했음과 고려조 건국시 남방을 평정하고 특히 후백제 견훤을 치고 신검(神劍)을 생포하여 크게 공을 세워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벽상공신 무열공(壁上功臣 武烈公)의 훈작(勳爵) 을 받은 광리군 휘 긍훈(兢訓)이 사후 임진왜란시 고을 일대와 추화산에 침입한 왜군을 신병이나타나완전히격퇴 했으며 병자호란시에는 이필달(李必達)이 부군(府軍)을 이끌고충북 쌍령(雙嶺)에서 분투중 꿈에 나타나 무사히 전원을 귀환케 했다는 전설이 있다. 후일 부민과 세간에서 그 공적을 추모하여 사당을 짓고 소상을 모셔 향사를 올려왔다.

지금도 폭 1.5m 높이 5m의 석축(石築)이 300m정도 남아있고 성의 둘레는 1km였다는 기록도 있다. 산정(山頂)에는 성황사(城隍祠)의 유지(遺趾)가 있고 창훈각(彰勳閣)이라 하여 광리군의 사당자리이다. 서북부 정상에는 봉수대(烽燧台)로 전해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추화산 봉수 남응 남산 북보 분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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