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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공(聱漢公) 휘 기양(起陽) |

칠탄서원(七灘書院)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칠리탄(密陽市 丹場面 美村里 七里灘)
손기양(孫起陽)공은 字는 경징(景徵)이고, 號는 오한(聱漢)이며 초호는 송간(松澗)이다.
1559년(명종 14년) 기미 7월 20일에 경상남도 밀양시 용성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문하에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등 여러 석학과 교유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을유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무자년에 문과 급제하여 1589년 기축년에 성주학교수가 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많은 훈공을 세워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에 제수되었다.
1600년 경자년에 성균관 전적 겸 중학 교수가 되었으며, 1601년 신축년에는 경주 교수 겸 제독관을 배수받았다. 관직으로 통훈대부에 이르러 창원대도호부사를 배수받았으며, 영천, 울주, 창원 등 여러 고을을 두루 거쳤으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두루 있으며 또한 거사비(去思碑)도 있다.
1613년(광해 5년) 계축년에 사헌부 장령과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16년 병진년에 통정대부로 승계(陞階)되어 상주목사를 배수받았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622년 임자년에는 관함(官銜)이나 축호(祝號)를 쓰지 말라 유명(遺命)을 미리 남겼다.
만년에는 수석이 빼어난 진암(眞巖)의 칠리탄(七里灘) 위에 서 낚시하며 세상사에 뜻이 없었다. 경서를 공부하며 바른 길을 닦는 데 힘쓰며 서책에 붉은 줄을 치며 그 귀취(歸趣)를 알아낸 것을 고증함으로써 그 학문의 내력을 밝혀 많은 공덕을 이루었다.
1617년 정사년 1월 11일에 졸하시니 향년 59세였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묘갈명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묘지명을 지었다. 1844년 헌종 10년 갑진년에 칠탄서원에 배향되었다. 참판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이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을 지었다. 묘는 밀양시 단장면 국전리 화산 자좌(子坐)에 있으며 묘갈과 석물이 있다.
오한공은 조선 선조(宣祖)조때 여러 요직 전적(典籍), 울주판관(蔚州判官), 영천군수(永川郡守), 창원부사(昌原府使)등을 거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분투하였다. 특히 석골사(石骨寺)에서 대승(大勝)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초기에는 혼정(昏政)을 개탄하여 장령(掌令) 목사(牧使) 직을 거절하고 하향(下鄕)하여 학구(學究)에몰두하며 많은 시문(詩文)과 저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