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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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공(遯巖公) 휘 기남(起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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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사진

경북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

 

1539년(중종34)~1606년(선조39), 자(字)는 문선(文善) 호는 돈암(遯巖)이다. 군수공 휘 대석(大錫)의 6세손이며 돈암공파(遯巖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조부는 의흥 입향조인 손번(孫蕃)이고 부는 손풍정(孫豊貞)이며 경북 군위군 의흥면 금양리 출신이다.

1592년(선조25) 공의 나이 54세 임진왜란 때 의흥향교(義興鄕校)가 불에 타자 향교에 들어가 오성위판(五聖位版)을 짊어지고 의흥현(義興縣)의 동쪽 선암산(船巖山) 성재암(聖在巖)에 옮겨놓고 밤낮 보살피며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분향(焚香)하였고, 연로하신 어버이를 업고 사림산(士林山-鳥林山이라고도 함)으로 가 움막을 치고 무려 8년간을 병란을 피하였는데, 그의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하여 노루를 잡아다주어어버이의 공궤에 큰 도움을 받았고, 공이 밤새 위판권안소(位版權安所)를 지킬 때에는 호랑이가 동행 호위하였다고 으흥군수(義興郡守) 신태철(申泰哲)이 찬(撰)하였다. 병란이 끝나자 의흥향교는 불에 타 재가되었은데 오성위판(五聖位版)의 색깔은 변색없이 완전하였다. 1599년(선조32)에 수사(繡使)민후홍(閔候弘)이 전후 사실을 알고 임금께 장궤를 올리니 임금께서 공을 불러 복호(復戶) 4결(四結)을 즉석에서 내리니 공께서는 복호 4결은 신(臣)에게 너무 과하니 2결은 나라에 되돌려 바치니 임금께서는 너는 나라에 충신이요, 부모에게는 효자이며성문(聖門)에서는 어진 제자다 하면서 어사주(御賜酒)를 내리셨다.

사후(死後) 1607년(선조40) 증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이 되었고, 1699년(숙종25) 화계사(華溪祠)를 짓고 위패(位牌)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냈다.

현재 의흥향교에 모시고 있는 오성위판은 손기남(孫起南)이 8년간 선암산(船巖山)에 파난하였던 위판(位版)으로 경상도내에는 당시의 위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원판이다.

저서에 돈암선생실기(遯巖先生實記)가 있다. 이 돈암선생실기 木板) 23점중 21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으며, 2점은 경북 군위군청내에 있는 군위숭덕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한국유교책판으로 퇴계문집등과 더불어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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