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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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副提學) 휘 비장(比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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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비장의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삼세제단하(三世祭壇下)

 

공(公)은 부제학사간원대사간상호군(副提學司諫院大司諫上護軍) 휘 비장(比長)이며 목사공 휘책의 현손(玄孫)으로 1464년(세조10년) 온양 알성시(謁聖試)에서 등과하여 예문관 수찬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등과15학사(學士)의 도상(圖像)에 들었고 서거정(徐居正)등과 동국통감을 찬진(撰進)하였다. 공조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副提學)에이르렀다.

지금 전하는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 <동국통감>은 성종 14년(1483)에 시작 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되었다. 즉 성종 14년 10월에 서거정이 여러 문신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에 대한 주석을 붙이고 있던 중 경연 자리에서 연주시격의 주석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을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년 만인 성종 15년 (1484) 11월에 이를 완성하였는데, 이렇게 짧은기간에 완성을 보게된 것은 이미 앞에 완성된<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 기왕의 사서(史書)를 대본으로 하여 정리 편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편찬자는 자세히 알수 없어도 서거정을 비롯한 세조 이래의 훈신(勳臣)들 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된 <동국통감>에 대하여 성종은 만족하지 않았는데, 특히 사론(史論)에 대하여 그러했다. 그에 수록된 사론은 모두 기성의 사론을 인용한 것들뿐이고, 편찬자가 새로 지은 사론은 한편도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은<동국통감>의 개편을 명한 것 같으며, 성종 16년(1485) 7월 드디어 개편된 <동국통감>이 완성되어 이를 <신편동국통감>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지금 전하는 <동국통감> 이다.

 

이 <신편동국통감>의 편찬자는 훈신계(勳臣系)의 서거정(徐居正) 이극돈(李克墩) 정효항( 鄭孝恒) 이숙감(李淑瑊) 김화(金?) 이승녕(李承寧)과, 사림계(士林系)의 표연말( 表沿沫) 최부(崔傅) 유인홍(柳仁洪), 그리고 손비장(孫比長)등 10인이었는데 이것을 보면 <신편동국통감>은 훈신과 사림의 합작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라 하겠다.

 

또 <신편동국통감>에 새로 204편의 사론이 첨가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8편을 최부가 새로 지었다는 것을 보면 그 나머지의 대부분도 사림계에 의하여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신편동국통감>은 대개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를 대본으로 하여 그것에 첨삭(添削)을 가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화한 모두 56권으로 된 사서로서 외기(外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로 되어 있다.

 

휘 비장(比長)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자(字)는 영숙(永叔)이고 호(號)는 입암(笠巖)이다. 아버지는 현감 민(敏)이고 부안에서 출생했으며, 1464년( 세조10)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69년(예종 1) 예문관 수찬으로 있으 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 및 <예종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2년 1471년에는 그 공로로 이조정랑으로 승진되고 1475년 장령이 되어 여러차례 시무소( 時務疏)를 올렸다. 1476년 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부제학 참찬이되어 간언에 기꺼이 따를 것과 대간의 임기를 연장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시무4조(時務 四條)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다음해 대사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행부호군( 行副護軍)이 되었다.

1478년 승지로서 왕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예에 어긋났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1485년 서거정(徐居正)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찬진(撰進). 이어 공조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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