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소윤공 수원종친회 2026년 정기총회 참석, 계보를 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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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남호 | 2026-02-22 19:27 |

소윤공파 수원종친회(명인공파) 손석태회장 의 인사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 회장과 종사국장 손교영, 사무국장 손영동 ,부회장 손육례, 감사 손정구등 임원들은 2026년 2월 22일 수원월드컵경기장 컨밴션에서 소윤공파(명인공) 수원종친회 총회에 참석하여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며, 계보의 변천사와 주요 인물들의 활동사항, 종친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 심도있는 논의를 하는 종친회장 손석태를 비롯한 종원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26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손석태회장은 수원종친회의 향후 발전방향에 대해서 설명하며, 묘원관리와 향후 납골당 설치에 관한 건에 대해서 종원들이 협조를 구하였으며, 선조들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소윤공파후손중 명인공 직계후손들이 묘원이용에 관한건도 설명하여 참석한 종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어 중앙종친회 손남호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내빈소개와 손남호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손남호 회장은 명인공 후손들의 묘역성역화 사업을 높이 치하하며 소윤공파의 후손인 명인공 후손들의 정성과 묘역조성에 대해서 1973년 7월 10일에 파장동에서 기자(基字)의 11대조 이하(代祖以下) 15기(基)의 묘(墓)와 구운동(九雲洞)에서 기자(基字)의 7대조 이하(代祖以下) 16기(基)의 분묘(墳墓)를 각각 이전하여 합부하고 묘역을 정화, 정리함과 동시 무덤 설치의 격식을 간략히 하고, 묘비를 마련하지 못함에 자손의 한이 되어 우리 종중 제현의 숭조지성(崇祖之誠)으로 좋은 돌과 길일을 택하여 계단 아래에 비석을 세우니 엄숙하고도 가지런함으로 완성되었다.
이에 종친회에서는 가히 위로는 오랜 세월동안 잠드신 조상님의 영령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을 전할 것이니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종친들중에 그 누가 우러러 경모하여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데 우리 종족은 천년 백년이 흐르도록 대를 이어 서로 힘쓰고 도와서 선영을 지키는 일에 각별한 정성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혀있어 많은 종중에서는 본보기로 삼아갈것이라고 치하하였다.
소윤공파의 중요 인물로는 30世 소윤공 진(溱) 字 사청(士淸) 開城少尹을 입향조로 아들인 31世 소경공 원사(元嗣) 字 여원(汝元)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을 역임하였고 아들 삼형제를 두었으며 32世 一子 혁(奕) 고성공(固城公)은 益山郡守 固城郡事역임하였으며, 二子 서(叙) 성천공(成川公)은 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통례원사(通禮院事) 성천부사(成川府使) 오위상호군사(五衛上護軍事)를 역임, 三子 겸(謙) 별좌(別坐) 贈참판(參判)을 받았다.

수원종친회 문헌록에 의해 소윤공이하 후손에 대한 계보를 정리하여본다.
소윤공(少尹公) 휘 진(溱) - 30世
公의 字는 사청(士淸)이고 조선조(朝鮮朝) 세종(世宗1418~1450) 때에 개성소윤(開城少尹) 정삼품(正三品) 벼슬을 하시었다.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휘 숙재(淑才)의 6세손이며 순천부사(順天府使) 휘 양계(良桂)는 아버님이시고 배위(配位)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이시며 두 분 사이에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 휘 원사(元嗣) 아드님 한 분을 두시었다.
公께서는 개성(開城)에서 벼슬을 하시고 그곳에서 졸(卒)하시어 묘소가 개성 청석동(靑石洞)에 모셔져 있으니 자손의 도리를 못하고 있었던 점을 안타까이 여겨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할 것을 종족(宗族)이 합의하여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보라리 태봉산 남쪽 산자락에 양위(兩位)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하고 후손 일동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비석(碑石)과 의물(儀物)을 수립(竪立)하였다.
소경공(少卿公) 휘 원사(元嗣) - 31世
公의 字는 여원(汝元)이시고 문종(文宗1450~1452) 때 벼슬은 진사(進士)로서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 종사품(從四品)으로 궁중(宮中)에서 쓰는 가마 수레와 말(馬匹) 등에 관한 사무를 보는 관청에 종사하시었다.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諱 숙재(淑才)의 7세손 순천부사(順天府使) 諱 양계(良桂)의 손자, 諱 진(溱)은 아버님 이시다.
천성이 후하며 효성이 지극하시었으며 배위(配位) 강화황씨(江華黃氏)를 맞이하시어 삼남(三男)을 두시니 長男은 諱 혁(奕)이시니 단종조(端宗朝)에 익산군수(益山郡守)를 거쳐 고성군사(固城郡事)를 하시고 二男 諱 서(叙)께서는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내시고 三男 諱 겸(謙)께서는 별좌증참판(別坐贈參判)이셨다. 公께서는 벼슬하심에 절의(節義)를 다하시고 어버이를 효도로서 섬기시니 참으로 충효가 겸하여 갖추시어 깊이 감응(感應)되는 일이라 후손들은 잊지 말지어다.
묘소는 수원 조교(造橋) 해좌(亥坐)라 되어 있으나 찾을 수가 없어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보라리 태봉산 남쪽 산자락에 있는 長男 휘(諱) 혁(奕)의 묘소 근처에 후손들이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양위(兩位)의 추모제단(追慕祭壇)을 1977년 정사(丁巳) 4월 5일에 설단(設壇)하고 비석(碑石)과 의물(儀物)을 수립(竪立)하였다.
성천공(成川公) 휘 서(叙) - 32世
公은 시조 문효공의 32세손이요 국자진사공(國子進士公) 휘 숙재(淑才)의 7세손이요 개성소윤공(開城少尹公) 휘 진(溱)의 손자요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 휘 원사(元嗣) 둘째 아드님이다. 配는 해평윤씨(海平尹氏)이시며 두분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시었으니 장남 휘 효윤(孝胤)은 도정공(都正公)이시고 이남은 휘 효조(孝祖)이시다 公은 세조(世祖)때 통례원(通禮院)에서 벼슬을 하시고 종삼품 성천부사(成川府使)와 정삼품 상호군(上護軍)벼슬을 하시었으니 조선왕조실록 세조대왕실록에 기록되어있다.
도정공(都正公) 휘 효윤(孝胤) - 33世
公은 휘 서(叙)의 長男이시고 配는 함양박씨(咸陽朴氏)이시며 두분께서는 五男을 두시였으니 長男 휘 근(瑾)은 현감이요 二男 휘 형(泂)은 만호(萬戶)요 三男 휘 식(湜)은 낭장(郞將)이요 四男 휘 척(滌)이요 五男 휘 연(淵)이시고 조선 七代 세조때에 사맹(司猛)벼슬을 하다 부사정(副司正)벼슬에 올라 울산군수를 하고 만포첨절세사(滿浦僉節制使)를 하고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벼슬을 하고 卒하였으며 묘소는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에 있다
첨정공(僉正公) 휘 관(瓘) - 34世
公의 휘는 관(瓘)이요 또는 관(灌)이며 소경공 휘 원사(元嗣)의 증손자이며 성천부사공 휘 서(叙)의 손자이며 도정공 휘 효윤(孝胤)의 아들이며 四學에서 훈도(訓導)벼슬을 하였다. 燕山朝(1495~1505)에 登文科하시여 縣監 弘文館校理벼슬을 하다 奉常寺判官 僉正(나라의 제사와 시호에 관한 사무를 보던 관청에서 現三級理事官) 벼슬을 하였다. 配는 朴氏이며 舊譜에는 諱 진(溍)으로 國朝榜目에는 諱 관(瓘) 또는 r관(灌)으로 되어 있음.
서윤공(庶尹公) 휘 수밀(守謐) - 35世
公의 휘는 수밀(守謐)이고 조선조 중종때에 사천현감(泗川縣監) 종6품 벼슬을 하시고 형조정랑(刑曹正郞) 정5품슬을 하셨다. 오위도총부경력(五衛都摠府經歷) 종4품 벼슬을 하시고 한성부윤(漢城庶尹) 종4픔벼슬하셨다. 이 사실이 조선왕조실록 중종조(中宗朝)에 기록되어있다.
용인 수지구 성복동 명인공 수원종친회 묘소 비문(碑文)

[비문 원문]
산수(山水) 아름다운 성복(星福) 이곳 길지(吉地)에 수(數)많은 분묘(墳墓)를 모시니 이는 곧 아동방(我東方) 대성(大姓)이요 충효(忠孝)의 명문(名門)인 밀양손씨(密陽孫氏)의 기자(基字) 항렬(行列)의 11대조(代祖)이신 휘 명인(命仁) 할아버지를 위시(爲始)로 누대(累代)의 열조(列祖)를 봉안(奉安)의 정통(正統)을 이어온 신라(新羅) 육대성(六大姓)인 이씨(李氏) 정씨(鄭氏) 손씨(孫氏) 최씨(崔氏) 배씨(裵氏) 설씨(薛氏) 중(中) 삼순(三順)으로 사성(賜姓)되신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 이래(以來)가 성조(姓祖)가 되신다.
그러나 보상(譜上)에 효자공(孝子公) 휘 순(順)으로 위시조(爲始祖)는 구례마(俱禮馬) 이래(以來) 효자공지수백여년간(孝子公至數百餘年間) 보첩일이 무전고야(譜牒佚而無傳故也)라 신라 흥덕왕시(新羅興德王時)에 희세(稀世)의 효자(孝子)로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爲)하여 매아지출석종(埋兒地出石鐘)하니 왕(王)이 문기지(聞奇之)하여 내명장지낙부(乃命藏之樂府)하고 사공택일구(賜公宅一區)하고 세급미오십석(歲給米五十碩)하고 초배승작(超拜陞爵)하고 월성군(月城君)에 추봉(追封)되신바 있는 휘는 순(順)이요 자는 사구(士久) 할아버지가 시조(始祖)이시다.
나말(羅末)에 이르러 여군실덕(女君失德)하매 괴귀횡행(怪鬼橫行)으로 인다구몰(人多嘔斃)하매 공구괴귀(公驅怪鬼)하여 방지해중(放之海中)하니 경내수안(境內遂安)하였다 하며 이지국지부진(知國之不振)하시고 장검왕송도(杖劍往松都)하시어 견고려태조(見高麗太祖)하시니 태조기지임군무(太祖奇之任軍務)하니 남정북벌(南征北伐)에 혁혁(赫赫)한 무공(武功)을 세우시매 내봉광리군(乃封廣理君)하시니 성명(聲名)이 관일세(冠一世)하셨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 어른의 후예(後裔)이다.
26세에 와서 성천공파(成川公派)의 파조(派祖)이시며 세조조(世祖朝)에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지통례사(知通禮事) 성천부사(成川府使) 휘(諱)는 서윤(孝胤)은 세조조(世祖朝)에 음훈련원도정(蔭訓鍊院都正)을 지냈으며 묘재고위계하(墓在考位階下)요 28세 휘 형(泂)은 묘재용인덕동(墓在龍仁德洞)이요 29세 사직증예빈시정(司直贈禮賓寺正) 휘 수중(守中) 묘재고위계하(墓在考位階下)요 30세 휘는 열(說) 31세 휘는 경신(敬新) 32세 휘는 경운(景雲) 할아버지 묘는 모두 실전(失傳)되시다.
돌이켜보면 우리 손씨(孫氏)는 나여(羅麗)로부터 이조(李朝)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문무(文武)가 뛰어나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기개(氣慨)를 천품(天禀)으로 지닌 많은 효자충신(孝子忠臣)과 열사(烈士)가 배출(輩出)되었고 정치(政治) 군사학문(軍事學問)과 예술(藝術) 등 이름과 커다란 업적(業績)을 남기신 분 또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원래(元來)는 기자항렬(基字行列)의 11대조(代祖)가 되시며 33세 되시는 휘 명인(命仁) 할아버지 이하 열조(以下列祖)의 묘소(墓所)가 수원시 파장동(水原市芭長洞)과 구운동등지(九雲洞等地)에 산재(散在)하여 있었는데 정부(政府)의 산업도로 건설시책(産業道路建設施策)에 따라 부득이이편(不得已移遷)치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에 종중(宗中)에서는 각방면(各方面)으로 길지(吉地)를 물색(物色)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성복리 산 56번지(京畿道龍仁市水枝面星福里山五六番地) 임야(林野) 2정(町) 9반(反) 1묘(畝)를 매입(買入)하여 당국(當局)에 묘지설치(墓地設置) 허가(許可)를 얻어 이름을 밀양손씨수원파종중묘지(密陽孫氏水原派宗中墓地)라 하고 정지작업(整地作業)을 완료(完了)
드디어 서기(西紀) 1973년 7월 10일에 파장동(芭長洞)에서 기자(基字)의 11대조 이하(代祖以下) 15기(基)의 묘(墓)와 구운동(九雲洞)에서 기자(基字)의 7대조 이하(代祖以下) 16기(基)의 분묘(墳墓)를 각천봉합부(各遷奉合附)하고 이어 묘역(墓域)을 정화(淨化) 정리(整理)함과 동시(同時) 묘의(墓儀)는 약설(略設)되었으나 계전(階前)의 대비(大碑)를 마련하지 못함에 자손지만한사(甚爲子孫之慨恨事)러니 행오종중제종(幸吾宗中諸從)과 위원제현(委員諸賢)의 각별(格別)한 숭조지성(崇祖之誠)으로 분발주선(奮發周旋)하여 어시호선량석택일(於是乎選良石擇吉日)하여 입석어계전(立石於階前)하니 정모숙연이정(庭貌肅然而整)이라 가위상위천지영령어천추(可謂上慰在泉之英靈於千秋)요 하수불이지위업어후세(下垂不朽之偉業於後世)에 무감의(無憾矣)니 숙불경앙(孰不景仰)이며 숙소흠송(孰不欽頌)가 범오종족(凡吾宗族)이 자금이후(自今以後)로 지우천백세(至于千百世)토록 계계승승상면이조(繼繼繩繩相勉而助)하여 자손지상도(子孫之常道)인 선영수호(先塋守護)에 각별(格別)한 지성(至誠)이 있기를 바라노라.
[비문 해석 요약]
산수 아름다운 성복동 길지에 많은 분묘를 모시니 이는 충효의 명문인 밀양손씨의 기(基)자 항렬의 11대조이신 휘 명인(命仁)할아버지를 위시하여 누대의 열조(烈祖)를 봉안하니, 정통을 이어온 육대성씨중 무산대수촌장 구례마가 성조(姓祖)가 되신다.
그러나 족보상에 효자공 휘 순(順)을 시조로 하니 족보상에 비조(鼻祖)이신 구례마(俱禮馬) 이후 손순까지 수백년간 이름만 전해져 내려온다 신라 흥덕왕때에 희세(稀世)의 효자(孝子)로서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爲)한 매아지출석종(埋兒地出石鐘)의 고사가 있으니 왕(王)이 이를 듣고 명하여 집 1채와 세급미 오십석을 하사하고 월성군(月城君)에 추봉(追封)하셨다
신라 말에 이르러 여왕(女王)이 실덕하매 고려 태조를 뵙고 남정북벌(南征北伐)에 혁혁한 공을 세워 광리군에 봉하고 삼중대광사도 벽상공신에 오르니 이의 후예이시다. 32世에 와서 성천공파(成川公派)의 파조(派祖)이시며 세조(世祖)때에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지통례사(知通禮事) 성천부사(成川府使) 휘(諱) 서(叙)이시다.
33世 효윤(孝胤)은 세조(世祖)때에 음훈련원도정(蔭訓鍊院都正)을 지냈으며 묘는 아버지의 계단아래에 있으며, 34세 휘 형(泂)은 묘가 용인 덕동(德洞)에 있고, 35세 사직증예빈시정(司直贈禮賓寺正) 휘 수중(守中)의 묘는 아버지의 묘 계단아래이 있으며, 36세 휘 열(說), 37세 휘 경신(敬新), 38세 휘 경운(景雲) 할아버지 묘는 모두 실전(失傳)되시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손씨(孫氏)는 신라부터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문무(文武)가 뛰어나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기개(氣慨)를 천품(天禀)으로 지닌 많은 효자충신(孝子忠臣)과 열사(烈士)가 배출(輩出)되었고 정치(政治) 군사학문(軍事學問)과 예술(藝術) 등 이름과 커다란 업적을 남기신 분 또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39세 휘 명인(命仁) 할아버지 이하 열조(列祖)의 묘소가 수원시 파장동과 구운동 등지에 산재되어 있었는데 정부의 산업도로 건설시책에 따라 부득이 이전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에 우리 종중에서는 각 방면으로 길지를 물색하여 이곳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성복리 산 56번지 임야 2정(町) 9반(反) 1묘(畝)를 매입하여 당국에 묘지설치 허가를 얻어 이름을 밀양손씨수원파종중묘지(密陽孫氏水原派宗中墓地)라 하고 정지작업을 완료 하였다.
드디어 1973년 7월 10일에 파장동에서 기자(基字)의 11대조 이하(代祖以下) 15기(基)의 묘(墓)와 구운동(九雲洞)에서 기자(基字)의 7대조 이하(代祖以下) 16기(基)의 분묘(墳墓)를 각각 이전하여 합부하고 묘역을 정화, 정리함과 동시 무덤 설치의 격식을 간략히 하고, 묘비를 마련하지 못함에 자손의 한이 되어 우리 종중 제현의 숭조지성(崇祖之誠)으로 좋은 돌과 길일을 택하여 계단 아래에 비석을 세우니 엄숙하고도 가지런함으로 완성되었다.
이에 종친회에서는 가히 위로는 오랜 세월동안 잠드신 조상님의 영령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을 전할 것이니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종친들중에 그 누가 우러러 경모하여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데 우리 종족은 천년 백년이 흐르도록 대를 이어 서로 힘쓰고 도와서 선영을 지키는 일에 각별한 정성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혀있어 한글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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