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오한공파 입향조 손기양 불천위 제사에 동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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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남호 | 2026-02-28 18:45 |

밀양손씨 중앙종친회 회장 손남호는 임원들과 함께 2월 27일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00번지 소재 청절사에서 시향행사기 있어 죽원 제사에 참석하여 밀양(=밀성)손씨 오한공파 종중의 재실로서 오한 손기양(1558-1617)을 불천위(=부조위)로 모신 청절사 사당과 치재소로 현 오한공파 회장 손화현이외의 종원들과 손봉현종원의 집례로 종손 손상모가 초헌관, 중앙종친회 손남호회장이 아현관, 중앙종친회 손교영 종사국장이 종헌관을 맡았으며, 종원 30여명이 모인 가운데 불천위 제사를 마쳤다.
죽원 제사는 오한공 선생의 5세손 죽포 손사익 (진사,1711-1794)공이 선생을 불천위로 봉사하기 위하여 1753년(영조 29년)에 별 묘를 창건하고 그 옆에 치재소로 지었으며, 근세 1956년에는 후손 손진호 (1904-1976)공의 성금과 손굉수(1903-1979)공의 감독으로 노후된 부분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어 후손들이 매년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2000.1.25)로 지정된 죽원재사 건물에는 조선조 영.정조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 채제공 (1720-1799) 선생의 글씨로 쓰여진 '죽원재사' 편액 (*원판은 밀양시립박물관에 수장 중)이 건물의 정면 정안에 걸려있다, 그리고, 죽원재사 서쪽방 입구 상단 서미에는 대한제국 말엽 서울 출신 회산 박기돈(1873~1947) 공의 글씨인 '우모헌' 편액이 걸려있다.
손남호 밀양손씨 중앙종친회장은 “불천위란?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이다. 신주를 조매(祧埋)하지 않고 계속 봉사한다고 하여 부조위(不祧位)라 부르는 곳도 있으며, 불천위를 두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고도 부른다. 불천위에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 혹은 사불천위(私不遷位)가 있다. 일반적으로 유림불천위보다는 국불천위가 더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며 선조들의 위업을 칭송하였다.
이어 손남호 회장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문묘 배향자는 모두 18명이다. 배향자를 보면, 동무(東廡)에는 신라시대의 설총(薛聰), 고려시대의 안유(安裕), 조선시대의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준길(宋浚吉)이 배향되어 있고, 서무(西廡)에는 신라시대의 최치원(崔致遠), 고려시대의 정몽주(鄭夢周), 조선시대의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조헌(趙憲)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가 배향되어 있다” 며 오한 손기양공의 업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상의 기제사(忌祭祀)는 고조이하(高祖以下) 4대까지만 봉사하고 5대부터는 혼백을 무덤에 묻고 묘사의 대상으로만 한다. 그러나 불천위는 계속하여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기제사는 물론 묘사나 시제(時祭)를 지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가문에 따라서는 불천위에 대하여 기제사만 지내기도 한다.
불천위제사는 불천위로 정해진 뒤 3년째부터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제사의 절차는 가문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기제사의 절차에 준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불천위제사에는 지방의 유림이나 유지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종손이 주제를 하되 문중뿐만 아니라 유림에서도 제관이 선정된다는 점이 다르다.

또, 문중에 따라서는 후손들이 제관이 되어 사신(辭神)을 하면 유림들이 제사지내는 장소에 들어와 제배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불천위와 그에 대한 제사는 국가나 유림, 문중에서 정하는 공훈이 있는 훌륭한 사람에 대한 예우이기 때문에 훌륭한 조상은 살아 있을 때의 지위에 따라 죽어서도 특별대우된다는 구조를 지닌다.
또한, 죽은 이의 생존 시 업적이나 지위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조상숭배가 아니고 기념되거나 추도된다는 성격을 지닌다.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문중의 입장에서 보면 조정이나 유림에서 봉사할 만한 위대한 선조를 가졌다는 영예가 주어지기 때문에 문중 성원들의 단결과 동질감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위세와 우월감을 조장시켜주기도 한다. 그래서 불천위가 있는 문중에서는 명조(名祖)를 두었다는 점을 자랑삼는다.
오한 손기양은 부, 생원 손겸제(1536-1603)공의 자이며, 조선조 선조18 년(1585년)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선조 21년(1588년)에 문과에 급제 후 1589년 경상도 성주 교수에 재임하여 과만으로 임기를 만료하고 1591년 가을에 밀양으로 귀향하여 체류 중, 이듬해인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진왜란 초기에는 현재의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석골지역 일원에서 진사 이경승 공 등과 함께 향병을 모아 창의하였다.
밀주지(원명: 밀주지리인물문한지)에 의하면, 당시 향병들은 현재의 산내면 입구에 소재한 대암 협곡 등을 지키며, 작원관과 밀양성에서 그곳 지역으로 퇴각해 온 박진 밀양부사의 관군과 더불어 밀양성 및 작원관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 후 지역 일원을 방어하며 수호했다. 오한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같은 해에 성현도(현재의 청도군 삼성현 지역) 찰방에 임명되고 1595년에는 신녕 현감에 재임하였다.
전란 중에는 화왕산성과 팔공산성 창의에도 참여하며 왜적과 싸운 사실 등이 '화왕입성동고록'과 '팔공산회맹록', '공산지'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선조 38년(1605년) 선조의 명으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록으로 공신도감에서 발간한 '선무원종공신록권'에는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 등재되어 있다.
왜란 후에는 성균관 전적 겸 중학교수, 경주 교수 겸 제독관, 울주판관, 영천군수를 거쳐 창원대도호부사에 재임하였으나, 폐모살제 즉,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와 동생 영창대군 살해 등 광해군의 혼정에 실망하여 1612년에 스스로 사임해 귀향하였다. 그후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내려도 부임하지 않았으며, 통정대부 상주 목사에 승진 임명해도 계속 부임하지 않았다.
염퇴 후에는 출처의 의지를 분명히 하며 고향인 이곳 밀양의 다원(옛 이름: 죽원)마을에 은거 후 칠리탄(현재의 단장천 칠탄정 앞강 일원)에서 낚시하며 절의를 지키고, 전란으로 어지러진 향풍의 쇄신과 점필재 김종직, 송계 신계성, 회재 이언적 선생 등 여러 선현들의 공적과 학문을 선양하며 후진들의 강학에 전념했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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