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오한공파 입향조 손기양의 발자취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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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남호 | 2026-02-28 19:10 |

밀양손씨 중앙종친회장 손남호 칠탄서원 방문 기념식수를 하다 ( 좌로 손병윤. 손봉현 손남호 손교영 손영채)
●칠탄서원: '칠탄'은 '칠리탄'을 지칭하며, 중국 후한 (동한)때 엄광(자:자릉)은 어린시절 함께 공부했던 황제 가 내린 간의대부 벼슬도 마다하고 절강성 동려현 부춘산 아래 칠리탄에서 낚시하며 소요하고 은거한 고사에서 연유한다. 또한 오한 손기양의 철조시에 의하면, 칠탄정 아래 흐르는 강 일원을 칠리탄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곳 칠탄서원은 오한 손기양(1559-1617) 의 절의와 학덕을 기리며 배향한 칠탄서원 청절사가 있던 곳이며, 오한 손기양은 밀양(밀성)손씨로 1588년 문과에 급제 후 1591년 가을에 성주교수의 임기를 마치고 밀양으로 귀향 후 다음 보직 발령이 없어 산관의 신분으로 있던 중, 그 이듬해인 1592년 임진년 4월13일에 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 고울을 지켰다.
밀주지(원명:밀주지리인물문한지)의 기록에 의하면, 임란 발발초기에 당시 호거산(운문산 일원) 아래 석동(현재의 산내면 원서리 석골 일원)에서 향내의 이경승 진사 등과 더불어 향병을 모아 창의하였다. 당시 작원관과 밀양성에서 그곳(산내면 지역)으로 퇴각해 주둔한 박진 밀양 부사의 영병을 도우고 산내면 입구 협곡인 대암 등지를 지켰다.
그곳과 밀양성 및 작원관에 이르는 통로를 차절하고 산내 지역 등 향토를 방어했으며. 오래지 않아 같은 해에 성현도 찰방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신녕현감으로 재임하였다. 화왕산성(화왕입성동고록)과 공산성(팔공산) 창의 등에도 참여하는 등 전란 중의 공적으로 선조 38년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성균관전적. 경주교수겸 제독관, 울주판관,영천군수 등을 역임한 바도 있다.오한 손기양은 광해군 때에 이르러 조정이 혼정으로 문란하자 1612년 스스로 창원대도호부사직을 사임하고 당시 밀양의 죽원(속칭, 다원)으로 귀향하였으며, 폐모살제 등의 난정이 계속되자 실망하여 벼슬을 하지않고 은거하였다.
사직 후 사헌부장령과 사간원의 사간 등 대관과 간관 벼슬을 내리고, 계속하여 통정대부 상주목사로 승진시켜 임명해도 끝내 부임하지 않았으며, 1612년 이후의 관직은 사후 본인의 축문에도 쓰지못하도록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1612년 (임자년)이후 다원으로 귀향하여 칠리탄 일원에다 '허정'이라는 초정(초가집)을 짓고 은거해 낚시 및 소요하며 지냈다.
그후 세월이 오래 지나자 초정이 퇴락해, 1725년에 증손인 문암 손석관(생원,1670-1743)공이 종제인 손석범(1684-1723)공과 세칸의 집을 짓고서 '진암서당'이라 하였다. 그후 현손인 만향재 손수민(1689-1751), 5세손 죽포 손사익(진사,1711-1790) 및 죽오 손수두(1712-1775)공 등 후손들이 집을 넓혀 1748년에는 '진암계정'이라 했다,

1784년(정조8년)에 죽포 손사익 공은 종제인 만포 손사경(1731-1787)공과 함께 4채의 집을 짓고서 오한의 철조시어 '칠리탄'을 취하여 비로소 편액을 '칠탄정'이라 하였다. 1844년(헌종10년)에는 고을의 사림들이 사당을 세워 오한을 향사하고 편액을 '칠탄서원'으로 하였다가, 1868년(고종5년)에는 조정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다시 칠탄정으로 환원하게 되었다.
오한 손기양은 임진왜란 시기에 크게 어지러진 향풍을 다시 쇄신하며 점필재 김종직, 송계 신계성, 회재 이언적 선생 등 여러 선현들의 공적 선양과 아울러, 예림서원의 전신으로서 당시 죽원(다원)의 인근지에 있으며 임란 중에 피폐해진 점필서원의 건물과 위판을 향내의 선비들과 힘을 모아 수선하고,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 수령들의 협조를 받아 재정과 인력 등을 확보하여 서원의 운영이 연면히 이어지도록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에는 죽원(다원)마을과 칠리탄의 인근지역인 지금의 활성2통,구서원마을에 소재하던 점필서원(일명: 덕성서원)에서 후학을 위해 강학에 힘쓰는 등, 관직을 제수해도 광해군의 혼정 이후에는 출사하지 않고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절의를 지키고 관직 출처에 대한 입지와 처신을 분명히 한 고사가 있다.
당시의 심경을 시로 펴낸 오한 손기양이 지은 '철조(*철관조어: 관직을 거둬들이고 낚시함)'시에는 즉,'칠리탄 어귀에서 낚싯대 드리우니 푸른 강물은 맑고 얕으나 반짝이는 물결이 차구나. 당시에 낚시하던 *양구자(엄자릉)를 보고 도리어 웃었더니 마침내 인간세상에서 (나도?)간의 벼슬을 하였네'
[*양구자: 양가죽옷 입은 사람, 은둔자를 일컫는 비유의 용어가 됨. 즉, 간의대부 벼슬을 마다한 후한의 엄광(엄자릉)을 지칭하며, 오한 손기양 선생이 스스로 사퇴한 후 은거한 당시에 조정에서 사헌부와 사간원 등의 관직에 계속 임명하였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은 본인을 은유함.]라는 시가 있으며, 시 내용 중의 '칠리탄'에서 옮겨와 후손들이 이를 줄여 칠탄정의 명칭으로 정하였다.
●운강루: '운강'은 북송때의 범중엄(989-1052년)이 쓴 '엄(이름:광)선생 사당기'의 내용 중에 나오는 '운산강수(운산창창 강수앙앙: 구름 덮인 푸른산은 무성하고 강물은 넓게 흐른다.)' 에서 '운강'을 따온 명칭으로, 즉, 후한 때의 엄광(자: 자릉)이 간의대부 벼슬을 마다하고 절강성 동려현 부춘산 아래 칠리탄에서 낚시하며 은거한 고사와 연유하여 이를 은유해 지은 누각 명칭이다.
■《 찾아가는 길 》
칠탄정(칠탄서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에 해당하나 미촌리 쪽에서 가는 산길은 멀고 험하므로, 실제 진입로는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 소재 산외면 행정복지센터(면사무소)앞에서 율전로를 따라 다원들판과 율전마을을 지나 단장천에 놓인 활성2교 다리를 건너면 활성로와 만나는 밀양시 활성동(활성2통) 구서원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단장천 강과 연하여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기슭에 야자수잎 매트가 깔린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도보로 약 15~20분 가량 가면 칠탄정(칠탄서원)에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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